tue, September 21, 2010

하퍼스바자코리아 2010년 10월호가 오늘 아침 배달됐다. 짧은 원고를 썼더니, 추석 연휴 첫날 잡지가 도착했다. 추석 연휴에도 택배가 오다니. 표지 모델은 한눈에 봐도 '꼼데갸르송 COMME des GARCONS'을 입었다. 꼼데갸르송 한남동 플래그십 매장이 문을 연 후, 잡지들은 일시적으로 꼼데갸르송과 사랑에 빠졌다.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기로 유명한 레이 가와쿠보 여사도 국내 매체들과 인터뷰했다. 제일모직이 플래그십 매장을 열기 전, 그러니까 신세계인터내셔널이 꼼데갸르송의 첫 번째 정식 매장을 신세계백화점 본점본관에 열었을 무렵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잡지들은 '꼼데갸르송으로만' 된 화보를 찍지 않을까? 그때는 아직 물량이라든가 주목도라든가, 아무튼 뭔가 부족했던 걸까? 내가 잡지를 만든다면 그것만은 꼭 해보고 싶다, 고 생각한 것들, 그러니까 내 꿈(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열정적으로 다가서진 않았지만)의 희망 리스트들이 하나둘 사라질 때가 있다. 내가 잡지를 만들었다면, 꼼데갸르송만으로 된 화보를 해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패션지가 아니라, 신문이 하는 것처럼 레이 여사를 인터뷰해보고 싶었다. 고 피천득 시인도, 인터뷰라기보단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휘리릭 종이를 넘기다가 마음에 드는 글 몇 개를 읽었다. 화보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하이패션을 다루는 여성지가 마음에 드는 화보를 보여준 적은 별로 없다면 재수 없는 얘기일까? 게다가 선천적으로, 화보보다는 글에 먼저 관심이 간다. 유익한 글이 있었다. 흥미로운 인터뷰도 있었고 마음에 드는 배우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그런 기사만큼 재밌는 것이 잡지가 수집한 작은 소식들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다곤 해도 하나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가진 잡지가, 그들만의 잣대로 선정한 작은 이벤트, 전시, 기사, 새로 나온 아이템 같은 것을 보는 재미는 무작정 수집 일색인 인터넷과 양적 팽창으로 승부하는 블로그가 주지 못하는 장점이 있다. 설령 가십일지언정(가십을 얘기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저널의 눈이기에 좋아한다.

잡지를 담았던 까맣고 방수될 것 같이 생긴 봉지를 접어서 바닥에 슬쩍 던져놓는다. 손목시계 세 개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컴퓨터 주위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인간 실격은 33페이지까지 읽고선 몇 달째 제자리이고, 아이팟 이어폰과 아이폰 이어폰이 세월 차이만큼 다르게 더러워져선 디지털카메라 옆에 뱀처럼 널브러져 있다. 그 옆에는 안 쓰는 볼펜이 담긴 지퍼백과 갤러리 팩토리에서 날라온 전시 초대장과 깜빡 반납하지 않은 선글래스와 어떤 IT 이벤트에서 받은 연필 한 다스가 쌓인 시디 더미 옆에 착 달라붙어 있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해당 부서 공무원들과 기상청과 대통령은 느긋한 연휴 첫날을 보내지 못할 것이고, 깜깜한 밤이지만 추석이라 부모님의 대화는 거실과 부엌을 넘나든다. 아마도 '동이'에 대한 얘기다. 요즘 우리 집 최고 화제 드라마.

실패하지 않으려 했다는 말을 듣고 반박하거나 동조하거나 그냥 듣기만 하려 했지만, 한 마디로 복잡했지만, 그 말, 그 전화 통화의 뒤에는 왠지 더 차분해졌다. 9월은 진짜 가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징조다. 나는 완벽하고 싶지만 완벽과 거리가 멀어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완벽주의자이지만, 감사하는 것들이 생겼다.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상쇄하는 기쁨이 있다면 요즘의 그 마음 덕분이다. 미안하고 마음 전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대상들에게도 언젠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매일 정리해야 하는 어질러진 책상과 닮았다. 많은 생각이 삶을 위태롭게 할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생각해주는 생각이 모이면, 그 삶,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껴진다.

Comments

  1. 저도 기회가 닿을 수만 있다면 고 피천득 선생님과 대화를 꼭 나누어보고 싶었습니다. 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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