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 October 28, 2010 _ pressure

'압박'이란 단어가 '프레셔 pressure'라는 영어와 같은 뜻이란 걸 안 것은 아마도 '기동전사 건담' 때문, 그러나 건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던 세대는 아니니까, '슈퍼로봇대전' 시리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등학생 혹은 중학생 때였나. 거친 사춘기를 지날 때, 대학 입시 때, 당시에도 있었을 인간관계들, 혹은 돈 문제나 집안이 주는 스트레스 같은 것은 분명 압박이었을 테지만 그걸 '압박'이란 단어와 연결한 적은 별로 없었다. 생활기록부상의 나는 쾌활한 학생이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마음을 분리하는 법을 깨우쳤던 걸까. 중학교 2학년 때 너무 인상을 찡그리고 다녔더니 이마에 주름이 생겨버려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작정하고 한 번 웃어보자, 라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몇 달 만에 '석우는 참 잘 웃는다'는 얘길 듣게 됐다. 좀 질려버려서, 그 후로는 원상복귀까진 아니지만 무턱대고 웃어대진 않았다.

스무 살 이후에는 두 번 정도 인간관계가 확 바뀐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스트리트패션 사진을 찍었던 이십 대 초반. 학교에 정이 없는 대신 동대문에 출퇴근하듯 드나들던 당시 정말 많은 사람을 알았다, 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확장하고 싶은 관계는 아니었는지, 수없이 인사하고 사진 찍고 얘기하던 사람들과 제대로 된 술자리 한 번 갖지 않았다. 일하던 스트리트패션 회사가 망하고, 웹사이트는 없어지고, 200만 화소짜리 디지털카메라는 남고 사람들은 없어졌다. 생각해보면 당시는 관심사와 생활반경이 옮겨지던 시기였다. 동대문에서 홍대로. 친구들도 술도 홍대로. 몇 살 더 나이를 먹고서야 '아 그랬구나' 했던 거지, 연착륙과 다름없었기에 충격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이 내게 압박을 주느냐고 스스로 물으면 몇 개 대답이 나온다. 내가 한 잘못들.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게 한 잘못들. 이건 남에게 한 잘못과 연결되는데다 깊숙한 어디를 푹 찌른 뭔가가 박혀 있으니까, 전자보다는 조금 심각하지. 그리고, 하는 일에 대한 전방위적인 생각. 어느 자리에 있을 때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인가 하는 사소한 물음에서 압박을 느낄 때가 있다. 정착지를 찾지 못한 유목민의 불안감이 비슷할까. 이런 얘기를 술자리에서 꺼내면 주위 사람들은 대체로 나의 의견에 반대하며 그건 그렇지 않아, 넌 잘하고 있어, 같은 얘길 하고 나도 거기에 호응해 수긍하는 편이지만 오래 숨어 있다가 나타난 두더지 잡기 게임의 두더지처럼 불현듯, 혹은 불시에 스멀스멀 다시금 피어오르는 이 연기 같은 마음은 어떤 걸까. 무어라 말해야 할까. 모두가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는 나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일반화가 정답이거나 대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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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좀 추워졌고 어제와 같은 옷을 입었다. 밑위가 긴 검은 바지, 울 소재 라이더재킷, 옥스포드셔츠와 니트. 신발만 러닝화로 바꿔 신었다. 창밖을 보니 눈치 없이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은 은행잎들이 팔랑거린다. 압박에 대해 얘기하다 그 안으로 빠져들진 않고 싶다. 이런 마음일 때는 자꾸 언젠가의 대화가 떠오르는데, 조금 안타까운 것은 그때 본 하늘처럼 벅찬 기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용히 생각에 빠지고 싶은 마음과 그 반대로 시끄럽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항상 그래 왔다.

Comments

  1. 읽다보면 나도 진실된 글을 쓰고싶단 맘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재주를 지니신듯^^
    하지만 또 읽다보면 그날?의 옷차림 같은건 눈으로 보고싶단 맘이 더 간절해진답니다 보여주세요!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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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un/ 글에 대한 피드백, 감사합니다. 항상 좋거든요, 사진에 대한 피드백보다 어쩌면 더더욱.

    저는, 저의 사진은 거의 찍지 않습니다만 언젠가 마련(?)해보겠습니다. 종종 또 들러서 의견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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