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 반 _ thu, August 07, 2014

완벽하게 바쁜 시기가 아니어서 요즘은 노트북컴퓨터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별로 많지 않은 일을 아이폰으로 처리하고, 책상에 앉아 서 해야 할 일들은 아이패드로 한다. 어제저녁에는 며칠 만에 컴퓨터로 원고를 보냈다. 오늘도 몇 시간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며 칠간 의도치 않게 술을 마셨다. 그제는 십 년도 넘은 친구 도연이가 심심했는지 저녁 일곱 시 반쯤 대뜸 연락했다. 오랜 친구 는, 게다가 남자라면(여자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별로 긴 문자를 보내지 않는다. '어디심. 모해. 너는. ㅇㅋ.' 이 정도 면 대강 만날 수 있다. 죽이 맞고 편한 친구들과는 더는 일 얘기하지 않는다.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와 서로 사는 얘기 조금만 나 눠도 시간이 훌쩍 간다.

패션 디자이너들도 오랜만에 약속 잡고 만났다. 지난주 어느 날, 혜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 를 나누며 저녁 겸 술 마시다가 문득 그들이 보고 싶었다. 대화하고 싶었다. 일로는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그 빈도는 예전보다 압도 적으로 줄었는데, 가끔 아직도 관계가 이어진다는 것은 신기하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것은 이야기에서 나온다고 믿으니까. 남성복 레 이블 '문수 권 MUNSOO KWON'의 권문수 실장님과 커피 를 마셨다. 둘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네 시즌 룩북과 오는 가을/겨울 시즌에 나올 타이를 선물 받았다. 그의 컬렉션 은 첫 시즌부터 보았고 대강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인터뷰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떤 마음으로 옷 을 만드는지 좀 더 깊숙이 알게 된 기분이었다. 세 시간 남짓, 신변잡기는 제쳐놓고 '옷'과 '패션' 이야기만을 이렇게 길게 나 눈 것이 언제였나.

월요일에는 준지 JUUN.J의 정욱준 상무님을 뵈었다. 마지막으로, 그것조차도 오랜만에 만난 것은 린킨파크 LINKIN PARK의 조 한 Joe Hahn과 친구 리키 Rickey S. Kim 그리고 제일모직의 홍보팀 사람들과 만난 자리였고 나는 주선자 역할이어서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리키는 린킨파크의 회사 '머신 숍 Machine Shop' 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미국에서 나고 자란 교포이면서 나보다 몇 살 많다. 그는 지금 교포 친구들보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 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갈등하며 성장한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다. 당시 조 한은 몇 가지 일정으로 오랜만에 서울을 찾았고, 일 정 중에는 <스펙트럼 spectrum> 인터뷰도 있었 다. 그가 정욱준 상무님의 준지를 좋아해서 마련한 식사 자리였다. 다시 같은 공간에서 둘이 저녁을 먹고, 익숙하지 않게 단맛의 포 도주도 곁들였다. 사실 조금 긴장 아닌 긴장한 자리이기도 했다.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호형호제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그러다 결국 소 주를 마시러 갔다. 십 분, 십오 분 정도 걷는데도 땀이 비 오듯이 티셔츠를 적셨다. 한 일들, 하는 일들, 할 일들을 얘기하다 가 얼마 전 본 영화 <경주>가 그렇게 좋았다고, 올해 최고의 영화였다고 욱준 상무님이 말했다. 어딘지 비슷하면서도 좋 아했던 영화들이 줄을 이었다. <멋진 하루>, <봄날은 간다>처럼. 그는 요즘 이창동 감독이 좋다고 했 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라고 덧붙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의 나이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다시 되돌아온 패션 이야기에서 그 는 '준지'로 바라는 소망을 말했고, 나는 삼십 대 초중반에 하고 싶은 것들과 몇몇 고민을 말했다. 더 길어질 수 있는 자리였지 만 이미 조금 늦은 어느 잡지 추가 촬영이 있었다. '소주 생각나실 때 연락해주세요, 언제든.' 하면서 헤어졌다.

지난 <스펙트럼> 인터뷰 이후, 좋아하는 대학로 선술집에서 취하도록 마신 후 오랜만에 만난 '혜인 서 HYEIN SEO'의 혜인 씨와 진호 씨도 어제 역시나 좋아하는, 종로3가 서울극장 앞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안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이 특출한 디자이너 듀오는 뉴욕 브이파일즈 VFILES 컬렉션에 깜짝 데뷔하며 그야말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혜인 서' 첫 컬렉션은 데뷔 컬렉션을 선보인 디자이너로는 무척 드물게 스타일닷컴 Style.com에 실렸고,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는 분더샵 BOONTHESHOP에 처음 들어간다. 한국 패션 디자이너로는 경이적인 성과였다. 리아나 Rihanna가 그의 첫 컬렉션 - 사실 학생 작품이었고 정식 브랜드를 만들어 컬렉션을 낼 준비도 되기 전이었다 - 을 입고 다니며 전 세계 주류 패션계에 (마치 강제(?)로 세계 데뷔한 싸이 PSY처럼) 이름을 새겼는데, 벌써 서울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훌륭한 편집매장과 패션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인다. 다음 시즌 준비와 졸업 후 진로 설정 등을 위해 서울에 당분간 머무르는 이들이 가장 최근 한 작업 중 하나는 에미넴 Eminem과 합 동 공연을 여는 리아나의 무대의상 제작이었다고 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디자이너 레이블을 만든 셈이라 여러 가지 고민 도 많아 보였지만, 옆에서 보면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대화 속 말처럼 어떤 결과들이 결국 그들을 대변하고, 다가오는 사람들 사이 에서 신중하게 내릴 결정들을 신뢰하게 하는 뚝심 비슷한 것이 이 외유내강형 듀오에게 있어 보이니까. 그들과 만나서 조곤조곤 얘 기 나누는 것은 즐겁다. 다음에는 종로3가의 아주 훌륭한 순댓국집에 가자고 했다.

종종 부러운 사람들과 지점들이 있 다. 쉽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주류에 적응하고 원래 거기 있던 것처럼 빠르게 물드는 이들을 보면서 드는 이질감이 거울의 반대 편처럼 멀게만 느낄 때, 그들과 좀 다른 길을 택한 것에 복잡한 감정으로 파묻힐 때, 어떤 이유로든지 흔들거나 흔들릴 때 그런 생 각이 많아진다. 어느 때에는 깊이 빠져들고 죄다 재미없다가도 다시 마음을 잡고 생각하는 반복이 어린 시절의 롤러코스터 기분 정도 는 아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구나 싶다.

요즘 하루 하나꼴로 원고를 마감하는데, 그 와중에 가을에 낼 <스펙트 럼>과 몇 가지 프로젝트 밑그림을 함께 그린다. 욱준 상무님이 며칠 전 물어본 질문의 답은 꾸민 말은 아니었다. 가장 즐거 운 기분이 들 때는, 무언가 아직 하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고, 망상하고, 끄적이고, 그러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지는 그런 밤이 고 새벽이었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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