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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외편집자 圈外編集者


<해피 빅팀스 Happy Victims>라는 연재 기사를 본 건 지금은 휴간한 일본 패션 잡지 <류코츄신 流行通信·Ryuko Tsushin>이었다. '행복한 피해자들' 정도로 직역 가능한 시리즈는 '옷으로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말 그대로 특정한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들의 옷과 장신구를 끊임없이 구매하여 집에 쌓아둔 이들을 한 장의 사진과 짧은 글로 담아낸 시리즈물이다.

사진 속 피사체는 대부분 일본 젊은이들인데, 에르메스 Hermès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Maison Martin Margiela 같은 유럽 패션 브랜드부터 언더커버 Undercover나 포터스 Fotus처럼 더 마니악한 일본 패션 브랜드까지 다양한 열성 팬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직업 없이 일본말로 '프리터(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을 뜻하는 말)' 생활을 하며 온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에, 조금 과장하면 목숨을 걸었다.


© <Happy Victims> by Tsuzuki Kyoichi. Published by Seigensha 青幻舎, 2008.

이 기사를 처음 본 건 약 10년 전이다. 웹과 모바일 기기가 발달하고, 특정한 취향에 몰두하는 거리의 장벽이 줄면서 일종의 '패션 오타쿠'들이 한국에도 늘었지만, 당시 어느 편집매장 바이어였던 나는 우리가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한 브랜드의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다는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가령 앤-소피 백 Ann-Sofie Back과 카세트플라야 CassettePlaya 같은 브랜드는 마니아들이 존재하고 동시대 패션에도 제법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느꼈지만, 한두 시즌 브랜드의 팬이었던 고객들의 충성도는 여러 유행 스타일에 따라 곧 다른 브랜드로 갈아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본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오타쿠 정신(?)을 듬뿍 반영한 <해피 빅팀스> 작업은 그래서 한국에서는 불가능하겠구나, 생각한 적도 있다. 그리곤 도쿄 어느 서점에서 이 책의 단행본을 발견한 게 2009년쯤일 텐데, 그때야 비로소 저자가 누군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츠즈키 쿄이치 Tsuzuki Kyoichi·都築響一라는 1956년생의 나이 지긋한 편집자이자 사진가였다.

그가 <해피 빅팀스>를 내게 된 계기를 책의 서문인가, 혹은 다른 인터뷰에서 읽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뽀빠이 POPEYE>와 <브루터스 BRUTUS>라는, 일본 출판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패션·문화 잡지의 초기 프리랜서 편집자(잡일 담당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다고 한다)로 여려 경험을 쌓은 그가 수십 년 후 어느 패션쇼에 초대받아 첫째 줄에 앉아 있었다. 이 브랜드를 잘 모르는 자신은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멀리서 까치발로 컬렉션을 보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이 브랜드의 가장 열성적인 고객이었지만, 이를테면 업계 관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컬렉션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브랜드를 사랑하고, 그 애정을 '구매한다'는 직접적 매출 행위로 표출하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는 특정 인물이 구매한 패션 브랜드의 온갖 아이템이 거의 '아카이브 archive' 수준으로 진열되어 있다. 

촬영 장소는 대체로 좁은 일본식 주택의 방으로, 그 인물이 누구인지 혹은 왜 좋아하는지를 열심히 다루기보단 그의 일과를 시간순으로 정리해서 보여준다. 10시 기상, 7시까지 업무, 저녁에는 맥주를 한잔한다든지 같은 평범한 내용으로 말이다. 이 묘하게 사실적인 생활감이 고가의 패션 브랜드 의상 가득한 사진과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패션이 아닌 사진 예술 분야에도 소소한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일본과 유럽, 심지어 멕시코에 이르는 세계 순회 '사진전' 형태로 이어졌다(만일 당신이 메종 마르지엘라 20주년 기념으로 리졸리 Rizzoli 출판사가 발행한 거대하고 하얀 양장본 책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책의 한 장도 이 작업이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해피 빅팀스> 이후 작가에 흥미가 생겼고 여러 경로로 검색해보았다. 1990년대 초에 출판한 <도쿄 스타일 TOKYO STYLE, 1993>이라는 책이 이 작업의 원점이었다. '인테리어 interior'를 다룬 잡지나 단행본은 예나 지금이나 멋지고 완벽하게 정리한 사진들이 장식하기 마련이다. <도쿄 스타일>은 다양한 직업과 취미를 가진 당시 일본 젊은이들의 좁은 집의 인테리어와 스타일을 고스란히 담았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일부러 꾸미거나 정리하지 않고, 이런 스타일이 유행이라고 호소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이자 생생한 모습이라 당황스러울 정도다.


© <Tokyo Style> by Tsuzuki Kyoichi, paperback. Published by  Chikuma Shobo 筑摩書房, 2003.

<도쿄 스타일>의 문고판 책을 아오야마 어느 서점에서 사고는 - 일본어는 읽을 줄만 알고 해석이 안 되는 실력이라 - 휙 사진들을 훑었다. 정리하지 않고, 딱히 멋지지도 않아 남에게 공개하기 싫은 평범한 집안을 본 느낌이랄까? 주류를 향한 일종의 반체제 유머 느낌도 들지만, '스타일 style'이란 단어는 언론 매체가 전파하는 그야말로 가공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 더 많은 사람의 일상 속에 녹아든 무형의 특질이라는 생각에 설득 당했다(물론 이렇게 직접 언급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앞서 말한 두 권의 책을 (굳이) 문화 장르로 나누면, 한 권은 '패션 fashion'을 다루고 다른 한 권은 '인테리어 interior'를 다룬다. 하지만 두 권 모두, 각 분야의 주류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주류 시각의 이러한 '괴리'는, 사실 실제 사람들이 인지하는 '현실'에 훨씬 더 가깝다는 걸 우리는 안다. 수백만 원짜리 가방에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수트를 매일 입는 사람들은 패션의 중요한 인물이자 고객이지만, 그들이 전체 인구의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명백하다.

사실 두 책의 시각적 매력인 (종종 판매와 직결하는) '편집 디자인'은 썩 훌륭한 느낌이 들진 않는다. 엄청난 유명인사가 등장한 표지를 쓰지도 않았다. 특별한 경험을 특별하다고 얘기하는 우월감도 없다. 하지만 어떤 단행본, 어떤 기사들과도 다른 '확실한 관점'이 있다. 그 독특한 관점을 우직하게 믿고 추진하여 결과물로 꾸준히 낸다는 점이 츠즈키 쿄이치라는 편집자에게 감탄한 능력이다. 엄청나게 발로 뛰었을 거라는 당연한 추측에 조금 부끄러워진 것 또한 사실이다. 

<해피 빅팀스>와 <도쿄 스타일>을 사고서 몇 년 지나 <스펙트럼 spectrum>이라는 잡지를 만들게 되었을 때, 트위터로 그를 찾아내서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140자라는 제한 탓에 몇 개의 트윗을 날리며 그에게 존경을 보냈다. 훗날 인터뷰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그 또한 흔쾌히 응답해주었지만 여러 사정(과 게으름)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2017년 3월 한국어로 나온 그의 편집 인생을 돌아본 책, <권외편집자>를 발견하고 단숨에 읽었다. 서점에서 책을 사고 커피숍에 혼자 앉아 세 시간 남짓, 그야말로 폭풍처럼 휩쓸리듯이 집중했다. 한 권의 책을 이토록 순식간에 읽은 건 오랜만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펼치며 구체적인 편집 기술을 얻어가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맞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직장에서 편집자가 될 수 있는지, 더 좋은 물건과 문화를 소개하고 더 좋은 승진 기회를 얻는지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의 내용을 신봉하여 그와 비슷한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면, 결혼-집-자동차로 이어지는 사회적 평판과는 정반대로 접어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2017년이 아직도 반년 남짓 남은 지금, 올해 읽은 최고의 한 권으로 <권외편집자>를 꼽는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편집자'라고 수없이 (책 안에서) 말한다. 얼추 40년의 편집자 인생 중 계약직 프리랜서로 근무한 처음 10년을 빼면, 그는 어디에 소속된 적이 없다. 이런 환경이 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해온 작업이 어떤 생각과 과정을 거쳐 결국 이뤄졌는지 생생하고 담담하게 기록한다. 미사여구로 미화한 성취가 아니라, 읽고 싶은 주제를 다룬 책이 없어서 결국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실제 입으로 들으면 존경과 실소가 동시에 나올 태도를 내내 유지한다.

대형 필름 카메라 시대부터 전자메일로 발송하는 모바일 잡지 시대까지, '콘텐츠를 만들고 전달한다'는 츠즈키 쿄이치의 편집자 자세는 여전하다. 게다가 변하는 환경에 따라 사람들이 '정답'으로 이야기했던 원칙들을 비틀어 제시하는 혜안이 있다. 

그는 '기술'을 얻으려 한다면 이 책에 실망할 거라고 했지만, 무언가 만들어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주는 묵직함은 제법 선명하고 중요하다. 모두가 언급하는 커다란 행사 취재 노하우 대신, 술자리 누군가에게 듣다가 시작한 독자적인 이야기들이 이 책 안에 있다. 

사람을 만나고 연결하는 기회는 인터넷과 모바일로 늘었지만, 편리하고 작고 까만 유리 화면의 도구가 주지 않는 무언가가 사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그야말로 실천하기 어려운 고민이 책을 읽고 남았다. 짧게 쓰려던 감상이 길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권외편집자> 출판사 '컴인북스 Commin Books' 웹사이트 post.naver.com/commin_books


written by Hong Suk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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