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taste — June 28, 2021
어제는 전혀 일을 하지 않았고 오늘은 오전부터 여러 일을 했다. 전화로 이어진 회의들은 이를 발제한 사람부터 지치게 하였다. 일과 일 중간에, 늦은 밤과 새벽에, 일단 모두가 연락은 하지 않는 저녁과 밤 사이에 그래도 인터넷에서 찾은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시간 들여 읽었다. 모두에게 상대적이겠지만, 최근 꽂힌 것 중 하나는 작가이자 사진가인 크레이그 모드 Craig Mod가 남긴 경험들이다. 이메일 뉴스레터의 내용과 이를 만들기 위한 과정들. 단절에 가깝게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수도자처럼 걷는 시간들(물론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수많은 그의 뉴스레터 구독자는 모르긴 해도, 아마도 나처럼 그가 차근차근 구현한 삶을 어느 정도 동경하고 있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완벽하게 삶에 자리 잡았다. 주류가 되었든 아니든, 모든 브랜드와 회사가 그 안에 넣을 콘텐츠를 만들고 광고를 돌리기 위하여 무언가 한다. 이미 (나를 포함한) 많은 이가 소셜 미디어의 루틴을 하루의 일과 중 하나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스템은 더 견고해지지만, 사실 그 안에 남은 정보들은 대체로 휘발성이 강하고, 모두 무엇도 읽으려 하지 않고, 통찰이나 사색이 아니라 소비와 재미와 욕망과 흥미 위주로 이어지는 데 그친다. 가끔 반항아들이 존재한다는 건 개인적인 축복이다. 단 그것조차 때로는 종속 정보의 나열로 느껴진다. 삶이 어떠한 증명의 연속이라고 해도, 무얼 했다고 계속 증명해야 하는 삶은 사실 서글픈 일이다.
그렇다고 숲에 들어가거나 인터넷이나 최신 기기가 없는 삶을 바라는 건 아니다(오히려 나는 좋아하는 쪽이다).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 바깥에 자신의 채널과 플랫폼을 개인이 직접 만들거나 운영하는 것 아닌가 싶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 이전에 있던 '블로그스팟'을 비롯한 '블로그'도 방법이나, 역시 거대한 포털 플랫폼에 종속했다는 자체가 장점이자 단점이다. 선택지를 주기는 해도, 원하지 않는 곳에 광고를 심고 수없이 이어지는 스팸과의 전쟁 또한 일부가 된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이루어야 하고, 지켜야 하는 어떠한 규칙을 마주한다. 친구는 내게 '얼른 결혼해야지'라며 안부와 걱정이 동시에 섞인 말을 건넨다. 서울에 자기 명의의 집을 사는 것. 멋진 차를 타는 것. 멋진 곳에 가서 남들이 선망하는 멋진 행동을 하는 것. 예술과 창작의 결과를 소유하는 것 혹은 행하는 것. 남들과 비슷하거나 다르게 보이는 그 멋진 모든 것. 아, 지겹지 않나. 솔직히. 그래서 가끔은 코로나19가 준 혜택 또한 있다고 느낀다. 제한된 제약이 늘면서 사람들이 과거보다 자신의 내면이나 생각이 이끄는 데로 가는 데 조금은 충실해진 것 같다. 대유행의 몇 안 되는 장점이라고나 할까.
요 며칠 취향 taste이라는 단어에 관하여 조금 생각해보았다. 이를 넘어서는 더 우아한 표현도 있겠으나, 결국 개인이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취향이란 남들보다 앞선다든지, 남과 비교하여 더 나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결론에 점점 더 수렴하고 있다. 사람이 만족을 느끼고 삶이 충실하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겠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며, 우리는 더 많이 가질 수록 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모두가 내일을 준비하는 어느 밤, 당신은 그대로 커다란 TV에 튼 넷플릭스 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를 보다 TV보다 훨씬 더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잠이 들 수도 있고, 오래전 처박아둔 학자 혹은 작가의 책을 펼칠 수도 있으며, 편안한 스니커즈를 신고 얇은 외투를 목까지 채운 다음 충동적으로 한두 시간 정도, 동네보다 조금 먼 곳까지 찰나의 탐험을 떠날 수도 있다.
누구라도 무엇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으나, 사실 그 판단의 기준이란 영향력을 지닌 이들의 잣대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안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 취향이 더 나은 취향에 먹히고, 더 나은 취향이 더 많은 자본에 침식하는 구조에서 사람의 삶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 모든 선택은 자신의 결정이다. 내일 점심 메뉴부터 자기 전의 마지막 일과, 조금은 먼 겨울의 계획까지, 그 모든 선택이 스스로 일군 취향의 집합이자 남들과의 비교를 넘어선 뚜렷한 족적의 모임이었으면 한다. 그것이 남과의 비교가 아닌 나와의 비교를 통한 더 나은 삶의 방향이라고 느낀다.
앙드레 말로, 상상의 박물관 Le Musée imaginaire by André Malraux
© Photographed by Maurice Jarno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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