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journey diary
summer journey diary
100804 wed
5:43 am
온종일 잠을 자서 두통이 날 정도가 되어서야 깬 간밤,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다 여행 짐을 꾸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도산공원을 걸으며 적었던 목록엔 별 게 없어서 가방도 가벼웠고, 집중해서 준비한 일이라곤 아이폰에 음악 넣은 것뿐이었다. 구름 낀 새벽이다. 청량리역 아니면 고속버스터미널에 갈 것이다. '무진기행'의 무진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그 무진은 가상의 도시라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기차 타는 재미는 조금 뒤로 미루고, 일단 버스를 타기로 한다. 마침 온 140번 버스를 일단 탄다. 에어컨 바람이 차다. 여분 옷은 티셔츠 하나와 민소매 져지탑 하나. 올여름 잘 신는 푸마 러닝화를 신었다. 밤을 새웠기 때문에, 고속버스를 타게 되면 잠을 잘 생각이다. 잠이 잘 올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것도, 작년 초겨울의 도쿄 이후 처음이다. 뒤숭숭한 꿈자리가 마음에 걸리지만, 7월보다는 지금 기분이 낫다. 그래서 혼자 여행하기로 했다. 서울에 '두고 온' 약속과 미련들이 걸리지만, 이렇게 무작정이 아니고서야 8월 말이 되어도 나는 주저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무작정 출발한다.
06:04 am
140번 버스에서 세균 냄새나는 에어컨 바람이 맹렬하게 머리로 돌진한다. 모자를 쓰고 있어도 요리조리 피해 날라온다. 아침 여섯 시 뉴스는 오랜만에 듣는다. 일전에 받아 놓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오랜만에 읽는다. 읽지 않은 책을 가지고 올까 했지만 분명 짐만 될 것을 알아서, 버스 타기 전까지 심심풀이는 될 것이다. 여행과 스마트폰은 일견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여행의 도중에 도움을 받는 일도 자제하려 한다. 무진기행을 읽을 때 나는 절정을, 결말을 향해 고조되는 기분을 즐긴다. 허무한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그 안에 있다.
6:45 am
나와 친한 사람들은 얼마나 길치인지 잘 알 텐데, 논현역에 내린 것까진 좋았으나 멋대로 전혀 다른 길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다시 돌아간다.
7:22 am
정말 미친 듯이 헤매다가 고속버스터미널에 가까스로 도착. 바보도 이런 바보가…. 아무튼, 강릉행 우등버스에 탔다. 날은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열 시 반 정도 도착 예정이다. 동해를 갈까 했지만, 강릉은 안 가본 곳이라 가기로 한다. 가는 길에는 좀 자야겠다. 밤도 샜으니까. 고속버스 등 장거리 교통이 아니라면 교통비는 최대한 쓰지 않을 생각이다.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다.
8:31 am
여주를 지난다. 안개가 짙다.
10:51 am
푹 자고 일어나니 강원도 어디쯤을 지나고 있었다. 안개와 구름 낀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맑고 쨍하다. 어차피 시간도 많고 목적지도 확실히 없으니 고속버스터미널 주위부터 어슬렁거릴까 한다. 터미널 안 서점에 맵스 maps가 있으니 반갑다. '1Q84' 3권을 보니 드디어 읽으려고 꺼내둔, 집에 있는 1권이 생각난다. 산에 갈까 시내에 갈까 바다에 갈까. 뭐, 어디든 발길 닿는 곳으로 가면 되겠지. 아직 출출하진 않다.
2:03 pm
도서관에 들러 만화책을 봤다. 아이폰도 충전시켰다. 경포대까지 고작 5km.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걷는 것도 생각해봐야겠다. 훈풍이 분다.
4:26 pm
걷고, 쉬고, 걸어서 경포대해수욕장에 다다르는 길이다. 지금은 경포호 끝자락으로, 햇볕은 내리쬐지만 바람에 소금기가 서린 기분이 든다. 자전거 대여점, 싸구려 기념품 가게와 횟집과 모텔과 민박집들이 해수욕장임을 말해준다. 지금껏 튜브를 메고 가는 젊은이들 몇을 본 게 전부인데, 이제야 사람들이 나타난다. 해수욕장을 가로질러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해지기 전에 얼만큼 갈 수 있을까? 바다가 코 앞이다.
6:56 pm
송정해수욕장부터 신발 벗고 걸었다. 샌들, 무조건 가져왔어야 했다. 전화통화를 하고, 벤치에 앉아서 발을 말리고 모래를 털고 양말을 신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다. 여긴 강릉항이다. 북쪽보단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고, 여유롭고 한적하다. 아직 숙소도, 밥도 해결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앉아서 멍하게 있으니 편안하다. 소주가 당기는 저녁이긴 하지만.
9:07 pm
택시를 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걷는다. 바닷가 대신 번화가에 묵기로 한다. 서울처럼 복잡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저 직진하면 된다. 강가의 지는 노을이 사그라지고, 밤이 오고, 혼자 온 여행이니, 오만 생각이 들기 전에 짐을 풀고 빨래를 하고 싶다. 길가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잠깐씩 생각하고 참는다. 그러고 보니 강릉, '임대' 붙은 건물이 유독 많구나. 직진, 또 직진한다. 나오너라 번화가여.
9:54 pm
번화가의 텅 빈 모텔 도착. 현금가 45,000원. 발이 불덩어리다!
100805 thu
12:17 am
번화가라는 곳은 구글 검색으로 찾았다. 금학동이란 곳인데 서울의 명동 비슷하단다. 여름의 강릉은, 모두가 해수욕장으로 나간 걸까. 서울의 홍대 같은 폭발하는 젊음을 찾기 어려운 것은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까. 찍은 사진 중 수십 장을 추려내고, 퉁퉁 부은 다리의 스트레칭을 하고, 나가려던 계획을 바꿔 야식을 시켰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케이블 티브이의 영화를 본다. <28일>. 난 예전부터 영국 악센트가 좋다. 토요일 만나 반나절 함께 있던 고든도 영국 사람인데, 그의 악센트가 좋다. 그래서 휴 그랜트도 좋고, 콜린 퍼스도 좋고, 이완 맥그리거도 좋다. 이 여행과는 아무 상관 없지만. 일단 아주 늦었지만 저녁을 먹고, 몸이 괜찮다면 숙소로 오며 본 올드락 바에 가겠다. 안 갈 가능성이 극히 크긴 하지만.
6:22 pm
넋 놓다 보니 여섯 시가 넘었다. 한 34도까지 올랐을까? 어제가 무색하게 심하게 더웠다. 좋은 빈티지숍(체통)을 발견해서 뜻하지 않은 쇼핑을 했다. 빈티지 헌팅재킷을 지금 입을 리는 없으니 서울 집으로 바로 부쳐달라고 했다. 중앙동 시내에서 요거트빙수(이지만 팥빙수와 다를 게 없는)를 먹고, 땀을 쭉 빼며 걸어서 다시 어제의 출발선에 왔다. 대관령에 가려던 계획은 접고, 어제처럼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 가겠다. 민구의 배려로 위크엔티 티켓이 생겼다. 금요일에는 낙산이다. 하퍼스바자 촬영이 아니면 토요일에도 낙산일 텐데, 그래도 투도어시네마클럽 Two Door Cinema Club을 볼 테니 좋다. 혼자 하는 국내 여행은 몹시 쓸쓸하거나 우울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나 보다. 너무 더워서, 그럴 겨를도 없다. 아. 그러나 하나. 발바닥에 난 물집은 쿡쿡 쑤신다.
6:46 pm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에는 원주와 서울과 대전 쪽 버스만 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진로 급변경.
7:12 pm
하조대에 갈까 양양을 갈까 하다 낙산 행으로 결정. 서울에서 강릉 올 때도 출발 3분 전인가 표 끊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생수 하나 샀다. 한 시간 정도 걸리려나. 주위가 산이고 논밭이니 노을 지는 하늘이 참 예쁘다.
100807 sat
12:57 pm
퉁퉁 붓고 터진 물집이 여러 개. 지금은 횡성 휴게소. 어제 도착한 친구와 서울에 간다. 두 시 조금 넘어 도착인데, 비 온다는 서울이 기대되기도 하지만 뭐랄까 조금 아쉽다. 혼자의 여행에서 둘의 야행이 되고, 섬머위크엔티 페스티벌을 보고, 6월 말에 일 때문에 갔던 속초를 우연히 다시 가고…. 잘 놀고, 많이 걸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색할 시간은 적었지만. 다시 서울에 가면, 이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겠다. 지난달보다, 그리고 요즘보다 부지런히 하고 싶은 것을 준비해야겠다.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명동에 갈 것이다. 거기서 '하퍼스바자코리아'에 실릴 사진을 찍고, 혼자 찬찬히 명동을 돌아보겠다. 욱신거리는 오른발이 좀 걸리긴 해도, 가능한 한. 저녁에는 곧 결혼을 앞둔 용길이 커플과 고등학교 친구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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