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 March 10, 2017
자정을 넘기고서야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서둘러 털고 일어나려던 술자리를 마무리하니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겼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을까.
전날 잠을 깊이 자지 못했는지, 아직 남아 있는 여독인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잠에서 깨었다. 열 시가 넘었다. 혜진이와 통화를 했다. 시계를 보고는, 박보영 나오는 드라마 하나 빼고는 죄다 뉴스 특보로 점철한 JTBC 편성표를 본 기억이 번뜩 났다. 탄핵 선고 발표라는 열한 시까지 별로 시간이 없었다. 괜히 마음에 안달이 났다.
선고 생중계는 물론 실시간으로 TV를 통해 보았다. 마음이 어쩐지 안정되지 않아서, 늘 하던 것처럼 제자리 뛰기를 살살했다. 몸이라도 조금 움직여야지 불안이 가실 것 같았다. '그러나'라는, 앞 문장과 뒤 문장의 흐름을 180도 달리 만들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접속 부사가 세 번 이어지며 사람 마음을 피 말리게 했다. 탄핵은 물론 될 거로 생각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따위가 당선되는 미친 세상이니까 또 하나의 미친 일이 우리나라에 벌어진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쓸데없는 충격 완화용 자기 암시였다는 건 물론 22분 남짓 지나고서 시원하게 확인되었다.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던, 도대체 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저 주변의 찬양만을 받아 왔을 인생을 산 육십 대 여성이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났다. 사실 최순실의 수렴청정 기간이 단순히 이번 정권의 시간만은 아니었을 테다. 인생의 반 이상을 지배당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대가를 국민에게 전가한 책임은 너무나도 컸다. 사상 최악의 불명예를, 그는 받아들일 정신과 사고가 남았을까. 아니, 일말의 기대조차 미련스러울 정도로 원래부터 없었을까.
이후 과격 시위로 두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름이 끼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안타까웠다. 사고이든 극단적 선택의 결과이든, 집에서 청천벽력의 소식을 듣게 될 고인들의 자식과 손주들 생각이 났다. 급박하게 전개하는 뉴스 채널들과 온갖 사회관계망서비스 SNS에 폭주하는 의견 사이에 청와대는 마치 자다가 두드린 봉창이라도 되는 양 고요했다. 권력에 뼈까지 내준 '내 편'은 많았으나 충직하게 올곧은 직언을 전달해줄 인물이 '전 前' 대통령 주변 누구도 없었으리라. 태세 파악이란 말도 사치임이 분명했다. 그는 여전히 억울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몇 시간 후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했다.
2017년 3월 10일, 금요일은 작은 스마트폰 화면과 TV 속 충격적인 뉴스 그리고 물밀듯 쏟아지는 SNS 타임라인을 빼면, 사실 별다를 거 없는 하루였다. 저녁 아홉 시 남짓 집에 들어왔으니 딱히 '불금'도 아니었고, 그래도 아쉬워 연락한 친구들은 대체로 일을 하거나 마감의 나날이었고, 오래 본 스튜디오의 친구는 내주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전해주었고, 우연히 그 친구가 앉아 있는 다른 친구의 카페에 가서 오래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하입비스트 Hypebeast와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 몬스터 Gentle Monster가 주관한 촬영에 가서 총 스물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사진을 '찍히기도' 했다. 곧 발매할 <하입비스트> 매거진에 이 콘텐츠가 실린다고 했다. 에디터 분은 내가 예전부터 주시하던 분으로 어쩐지 참 반가웠고, 선배로 부르라고 하였다. 사진은 기석이 Cho Giseok가 찍었다. 우린 언제 술을 마시나, 하였다.
가로수길에서 종종 가는 빈티지 매장에 들러 잠시 구경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그간 했던 일과 해야 할 일들을 조금 정리하였다. 낮은 명백한 봄 날씨였으나 밤이 오며 급격하게 추워졌다. 니트 소재나 면 소재를 가리지 않고 목을 감싼 터틀넥 디자인을 편애하는데, 며칠 풀린 날씨에 목을 드러내놓고 다닌 걸 조금 후회했다. 수기네 가게에서 본 '땡땡 Tintin' 제품 하나 산다는 걸 깜빡하였다. 어떤 약속도 잡지 않은 귀가가 조금 아쉬워서 일전에 산 안동 소주를 한잔 들이켰으나 역시 술이란 집에서 마실 때 내가 아는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다음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까. 5월 초순일까 4월 하순일까. 결혼하는 친구와 비슷하게 준비하는 나이가 된 동갑내기들 각자의 고민과 삶을 듣고 웃고 떠들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그러다 보니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조용히 혼자 걷다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는 사실까지 그저 그런 금요일 저녁, 흔한 하루였다. 하나 변한 것 없어 보이는 일상임에도,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체증 하나가 쑤욱 하고 내려간 것만은 분명했다. 가만히, 모든 사람의 세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하나씩 변해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처음 투표권을 얻은 스무 살에 뽑았던 돌아가신 전 대통령을 떠올리며 생각하였다. 세상을 뒤덮고, 뒤엎었던 큰일을 빼면 특별할 것 없었다고 해도 무언가 분명히 변해갈 것이다.
Fri, March 10, 2017
젠틀 몬스터 가로수길 플래그십 매장 GENTLE MONSTER Garosu-gil flagship 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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