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Fashion — Fri, February 14, 2020


처음 옷에 관심 두게 된 계기를 과거 여러 자리나 인터뷰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모두 똑같이 입고 다니던 중고교 시절, 나는 적당히 유행에 관심 있고 우연의 일치로 그 유행이 시작하고 저무는 압구정동에서 학교에 다닌 대체로 평범한 10대 남자애였다. 그때 유행은 지금보다 더 크고 적었으며 휩쓸리기 좋았다. 사람의 이름을 딴 옷과 장신구가 연예인과 범죄자 사이를 넘나들며 매체와 시장을 점령하기도 했다(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1990년대 - 그러니까 나의 10대 시절 - 를 직접 겪지 않은 누군가가 요즘 사람들이 향수처럼 얘기하는 풍요로운 문화의 시대는 어땠는지 물어본 적 있다. 지금도 당시 음악을 듣지만, 환상처럼 다양성이 공존하는 세상은 아니었다. 정보는 더욱더 비대칭이었다.

​이후 패션과 옷에 꽤 진지한 관심이 생긴 후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에는 패션 디자이너가, 다음에는 패션 에디터가 되고 싶었다. 외국 디자이너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던 코흘리개가 그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는 그들의 친절함과 창조성에 감동했던 추억도 있다. 가까운 거리에서 흥망과 고군분투를 오가던 또래 디자이너들과 소주 몇 잔 정도 기울이게 되었을 때부터는 이 업계가 돌아가는 방법, 시스템, 사람들, 유행, 창작자들을 사랑하였다. 디자이너도 아니고, 에디터도 아니고, 언젠가의 나는 기록하는 관찰자가 되고 싶었다. 

현대 사회의 패션은 모두가 어느 정도 합의한 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비싸거나 저렴한 옷으로 남들을 판단한다는 뜻은 아니다. 옷이라는 매개체로 스스로 '패션'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척도 정도는 된다는 얘기다. 그중 열정이 있는 이들에게는 특히 유용한 자기표현 수단이 된다. 지금도, 아니 이제 유행의 공유가 실시간으로 번지는 시대에 어떤 패션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은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스니커즈, 스트리트웨어, 하이엔드, 유틸리티, 업사이클링, 지속 가능한 패션과 무수한 협업이 ‘평범한’ 상태가 된 것처럼, 때로는 느껴진다.

​언젠가 나는 진심으로 패션을 사랑하였다.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문화 중 패션만이 다른 분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높고 낮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면허와 차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옷을 입고, 남보다 좀 더 신경 쓰는 이들이라면 지금 무엇이 유행하는지 자의와 타의로 선별하거나 받아들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섞여 있는 흐름과 문화가 어린 나는 즐거웠다. 운 좋게 남보다 조금 더 앞선 무언가를 찾아내고, 획득한다는 쾌감 혹은 우월한 감정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이제 나는 패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일의 반절 이상이 여러 층위의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회사들과 관계해도 기쁨을 느끼는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유행과 트렌드를 종종 얘기하는 직업이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그 분야 안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이나 소속감 따위는 희미해진다. 10대에서 20대로, 다시 30대를 살아오며 여전히 옷과 장신구는 개인 소비의 큰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할 때가 있으나, 그 즐거움이란 모두가 보는 엇비슷한 뉴스들이 이토록 지루한지 깨닫는 실망의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 나를 흥분하게 하는 것은 유행과 자극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한 대 맞은 듯한 컬렉션을 보며 이미 머릿속으로 ‘저걸 갖고 싶다!’고 강하게 외치기도 한다. 다만 요즘은 패션이라는 분야를 넘어서 사람들이 지닌 창조의 면면을 좀 더 살펴보고,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관찰하거나 그들의 일부로서 기능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옷이나 패션이나 유행의 첨단을 달리지 않아도 이제는 되었다. 이 업계의 클리셰 같은 말 중에 패션은 유한하고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명언이 있다. 동의한다. 동의하지만, 그조차 때로는 더 큰 유행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마수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 패션이든 스타일이든 - 그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나,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옷으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그들에게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안에는 고민이 있고, 때로는 꿈 같은 성취와 현실적인 비극과 스트레스가 공존하며, 거창하게 표현하면 때로는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과 청년 문화가 담겨 있다. 모두가 그것에 주목하지는 않더라도, 대중문화의 다른 분야처럼 이곳도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오늘 써네이 Sunnei의 컬렉션을 다시 찾아보다가  'I Hate Fashion'이라고 쓴 상의를 입고 나온 모델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대 가장 성공한 신예 브랜드를 만든 서른 남짓한 디자이너들의 선언에 머릿속으로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를 막론하고 패션을 좋아하는 이들 중 다수는 유행을 좇거나 종속해 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도 숨길 일도 아니고 그저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승자이다. 대척점의 일부는 유행하는 패션을 넘어서 옷 자체를 남들보다 심각하게 좋아하여, 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만드는 사람과 구매하는 사람 모두 포함하여 말이다. 주변에 그런 이들의 작업을 볼 때 나는 성냥팔이 소녀의 촛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룰 수 없는 환상을 좇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찰나의 따뜻함을 현실처럼 받아들이고 행복해질 수도, 혹은 사라졌다고 생각한 두근거림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종종 나는 패션이란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이 바꾼 사적인 감상의 변화를 닮았으면 좋겠다. 90년대의 나는 어렸고, 정보는 적었고, 새로운 무언가를 갈구할 수 있는 범위 또한 좁았다. 지금은 날마다 쏟아지는 음반 대신, 알지도 못했던 과거 음악들이 플레이리스트 안에, 바로 지금 노래들과 함께 들어 있다. 조금 과장하면 매일 그 발견의 연속이다. 어린 시절 패션이라는 유행과, 문화와, 심지어 인간관계의 접점마저 되었던 영롱한 관심은 점점 다른 곳으로 향한다. 1년 두 번의 시즌이 네 번, 여덟 번으로 나뉘고 있으며 아예 그 형식 자체가 깨지고 사라지는 과정에 있다. 가끔 그 모든 패션에 피로하다. 드물게 방문하는 명품 브랜드 전시회와 그곳에서만 마주하는 관계들에 고개를 돌린다. 요즘 나는 걷는 재미를 다시 느끼고 있다. 인터넷 공간이나 종이에 글을 적는 대신 다른 매체로 표현해보고 싶다. 그리고 여전히 패션을 일로서 마주한다. 하지만 그 안에 되도록 사람들의 실제 목소리가 담겼으면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편애하는 것은 결국 그 옷을 만든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컬렉션을 만든 거지? 이런 변형과 변주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했지? 숨기는 방식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거대했던 실험가, 마르탱 마르지엘라 Martin Margiela의 사각 모서리 실선이 남들이 보지 않는 뒤태 대신, 엄연한 하우스 브랜드로 도약한 메종 마르지엘라 Maison Margiela의 가방 전면에 수 놓인 지금이다. 본드 스트리트의 호화 백화점에서 나는 그 최신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가 잠시 고민하고 돌려놓았다. 두근거리면서 밤새 옷과 디자이너를 이야기하던 과거의 나와 과거의 친구들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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