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ENUEL magazine, April 2020 issue — 코로나19의 세계, 그리고 지금의 패션
어제 녹화한 서울패션라디오 Seoul Fashion Radio 36화에서 '코로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3부 주제로 다루었다. 이제 이 세계적 대유행을 종료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과 더불어, 전무후무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변화로 나아갈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랫글은 <에비뉴엘 AVENUEL> 매거진 2020년 4월호에 썼다. 원래부터 코로나 얘기를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임의로 바꾼 주제를 편집부가 받아들여주었다. 편집하지 않은 원문이다.
AVENUEL Magazine, April 2020 issue
재난의 시대: 코로나19의 세계, 그리고 지금의 패션 The Era of Disasters: Now Fashion with the World of COVID-19
1990년대 중반, TV에서 <아웃브레이크 Outbreak, 1995>라는 영화를 봤다. 더스틴 호프만과 르네 루소, 모건 프리먼이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국가 차원 위기에 빠진 생물학적 재앙, 즉 전염병의 확산 outbreak을 다뤘다. 어린 소년이 보기에도 영화는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지구에 행성이 충돌하거나 외계인이 침공하던 당대 할리우드 영화처럼 비현실적이라 한편으로는 안심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엄중한 현실로 다가온 재난을 마주하고 있다.
2020년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 WHO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하 코로나19 사태를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으로 선언했다. 1968년 홍콩 독감과 2009년 신종 플루 이후 세 번째 사례였다. 코로나19는 지난 20여 년 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스과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보다 강력한 양상을 띤다. 재난의 시대, 지금의 패션은 어떻게 나아가고 있을까?
원래 이 기사는 ‘재난의 시대’를 경험한 패션 하우스들이 어떻게 옷과 컬렉션, 캠페인 등에 그 영향을 불어넣고, 지속가능한 패션으로 탈바꿈하는지 다루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눈앞의 패션계가 코로나19로 맞닥뜨린 상황을 ‘과거’ 혹은 ‘시대’ 요소처럼 논하기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결론지었다. 재난의 시대, 패션이란 단지 스타일이나 유행을 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보다 한 걸음 나아가 사회와 대중문화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행동을 보여주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지난 1월 중순 필자는 영국 런던에 있었다. 밀라노부터 파리에 이르기까지, 2020년도 가을/겨울 시즌 남성복 패션위크가 한창 벌어지던 시기였다. 영국 TV에도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뉴스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인접국인 대한민국의 체감 지수에 비하면 그곳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달 남짓 지난 현재, 코로나19는 아시아 일부 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도시와 국경은 폐쇄되었고 정당한 사유 없는 이동은 전면 금지되었다. 상하이, 도쿄, 서울패션위크는 물론 터키 이스탄불과 저 멀리 남반구 호주 패션위크까지, 거의 모든 세계 패션위크가 취소를 선언했다. 파리 여성복 패션위크는 예정대로 개최했지만, 업계 큰손을 자처하는 중국 바이어들과 중화권 패션 브랜드들은 거의 모두 참여하지 않았다.
반년 앞선 미래의 패션 흐름을 점치는 패션위크만이 코로나19의 우산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샤넬 Chanel과 케링 Kering, 루이비통모에헤네시 LVMH 그룹은 미국 내 매장을 일부 또는 전부 폐쇄하기로 했다(2020년 3월 17일 현재). 구찌와 보테가 베네타, 알렉산더 맥퀸과 디올, 지방시와 로에베 같은 브랜드의 매장이 여기 포함된다. 뉴욕을 대표하는 삭스핍스에비뉴 Saks Fifth Avenue와 노드스트롬 Nordstrom 백화점부터 스트리트 패션의 대명사격인 슈프림 Supreme 또한 매장 폐쇄를 선언했다. 버버리는 중국 매장의 3분 1을, 나이키 Nike는 절반을 폐쇄하고 나머지 매장의 운영 시간을 단축했다. 이러한 패션 매장 폐쇄 조치는 일부 도시나 국가가 아닌 전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밀라노와 파리, 런던과 뉴욕 같은 패션 도시들은 사시사철 관광객이 가득했다. 그 다수가 패션을 소비하기 위하여, 혹은 패션위크처럼 1년에 수 차례 개최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도시를 방문했다. 바야흐로 지금 패션계가 취하는 행동은 세계 공통으로 일관성을 띠는 전대미문의 영역에 들어섰다. 세계 다수의 소매점 영업 중단이라는 극약 처방 역시 살면서 처음 보았다(심지어 2001년 9.11 테러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포함해도 말이다). 이는 코로나19가 지닌 파괴적인 전염성이 한몫한다. 아직 백신 개발은 요원한데,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여전히 최고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각국 정부와 전문가의 판단이다. 특히 유럽에서 크게 번지고 있는 코로나19의 현실을 바라볼 때, 사람들이 여가와 유흥을 중단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가장 먼저 타격받을 분야로 ‘패션’이 거론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코로나19가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전, 반년에 걸쳐서 준비한 2020년도 가을/겨울 시즌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들은 이 ‘팬데믹’을 브랜드의 앞날에 반영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여진은 지금 열리는 패션위크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새 컬렉션의 바이어와 취재진을 상대하는 파리의 한 PR 에이전시는 문 앞에 ‘악수를 하지 않는다’고 명시해두었다. 드리스 반 노튼 Dries Van Noten 컬렉션장에는 마스크를 나눠주는 진행요원들이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한 패션을 ‘셀카’와 거리 패션 사진의 콘텐츠로 활용(?)하는 일부 인플루언서와 관계자도 존재했지만, 이 사태가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패션 산업 종사자들은 이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책 마련에 분주해졌다.
장담하건대 패션이 이 위기에 영영 무릎 꿇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패션 산업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상황에도, 이를 극복하고자 지역 사회에 힘을 보태는 패션 브랜드의 미담 또한 속속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에 본사를 둔 LVMH는 자사 뷰티 브랜드 공장들이 손 소독제 생산에 시간을 할애한다고 발표하고, 이를 프랑스 당국에 무료 배포하기로 했다.
코로나19의 가장 큰 발병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패션 하우스들은 좀 더 직접적인 기부에 동참하고 있다. 베르사체 Versace의 도나텔라 베르사체 Donatella Versace는 딸 알레그라 베르사체 Allegra Versace과 함께 20만 유로를 밀라노의 성 라파엘레 병원 San Raffaele Hospital에 기부했다. <WWD>에 공개한 성명서에서 도나텔라는 ‘지난 몇 주간 이 병에 걸린 모든 사람과 그들을 돌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의료진들’에게 공을 돌렸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모두가 서로를 돌봐야할 때”라고도 덧붙였다. 세르지오 로시 Sergio Rossi와 카를라 펜디 재단 The Carla Fendi Foundation는 10만 유로의 성금을 (본사가 있는) 밀라노와 로마의 지역 병원에 기부했다. 아르마니 Armani 또한 밀라노와 로마의 지역 병원에 약 125만 유로를 기부했고, 라프 시몬스 Raf Simons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취임 소식으로 얼마 전 패션계를 뒤흔든 프라다 Prada 역시 이탈리아 병원에 집중 치료실을 기증한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스타일의 변화와 연결되는 지점 또한 탐지된다. 99%is-로 유명한 한국 패션 디자이너 바조우 Bajowoo가 ‘펑크 Punk’ 패션의 익명성을 상징하고자 제작한 ‘하이드 hide’ 마스크는 이 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출시되었다(그리고 언제든 구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인스타그램 포스트를 통하여 이 마스크 시리즈가 전부 동났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95달러짜리 오프화이트 OFF-WHITE 면 마스크 시리즈 역시 전 세계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에서 ‘솔드 아웃’을 찍었다. 사실 서구권에서 마스크란 존재는 일부 힙합 음악가들의 장신구 혹은 아시아인의 유별난 건강 염려증으로 비친 것이 사실이다. 지금 추세가 2분기와 3분기까지 이어진다면, 올가을 선보일 새로운 컬렉션에서 ‘마스크’를 비롯한 외부 위협을 차단하는 기능성 의류의 향연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전자상거래와 모바일 문화가 기성 산업의 설 자리를 앗아간 것처럼, 이 예상치 못한 재난은 ‘오프라인’ 패션위크 회의론과 대책 마련에도 불을 지폈다. 케링 그룹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 프랑수아 앙리 피노 François-Henri Pinault는 <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 인터뷰에서 “패션업계가 쇼룸 (비즈니스)의 디지털화를 시작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언론인 중 한 명인 미국 <보그 VOGUE>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Anna Wintour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급진적인 재설정(리셋)을 생각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들(디자이너들)은 창조의 원동력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이끌어 줄 세대입니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생각해야 합니다. (디자이너들을) 길가에 그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어요.”
사람들이 움츠려 있다고 해서, 디자이너와 창작자들이 컬렉션을 중단할 것인가? 오는 6월 개최를 앞둔 세계 최대 규모의 남성복 박람회, 피티 워모 Pitti Uomo에서 ‘코로나19 이후’의 패션계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피티 워모는 물리적 박람회와 더불어 패션 기업과 바이어를 연결하는 ‘e-피티 커넥트 e-PITTI Connect’ 플랫폼을 함께 지원할 예정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원격 상호 작용 기능을 갖춘 플랫폼의 최신 버전은 박람회가 예정된 6월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거대한 불안이 몰고 온 편견이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를 향한 인종 차별 문제로 이어진다는 뉴스 또한 곳곳에서 이어진다. 3.1 필립 림 3.1 Phillip Lim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중국계 미국인인 필립 림은 인스타그램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외국인의 위협이 아니라 인간의 위협”이라고 썼다. “아시아 공동체를 겨냥한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은 인종, 성별, 색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지금의 여파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무수한 예측들이 언론과 기업을 통하여 발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단기 전망이 주를 이룬다. 아마도 정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거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모든 일상을 중단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사스와 메르스가 유행했을 때, 주변 패션 디자이너들이 매장을 접고 브랜드를 중단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였다. 패션은 계속될 것이고, 사람들은 비록 움츠러들지언정 여전히 옷을 구매하고, 가방을 사고, 소비를 일으킬 것이다.
물론 당분간 오프라인의 매장과 번화가는 평일과 주말을 막론하고 침체할 것이 분명하다. 이럴 때일수록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을 지키고, 특정한 세력이나 국가가 아닌 모두가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행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아닐 수도 있지만, 가장 현명한 방법에 가까울 수는 있다. 좀처럼 다가오지 않은 탁 트인 일상을 상상하고, 새로운 디자이너들의 창조를 떠올리며, 패션과 옷이 주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되뇌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필립 림의 글 중 공감한 마지막 구절을 여기 옮겨 적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 소외된 지역사회와 기업을 지지할 것입니다. 적대감과 혐오감 앞에서 동맹이 될 것이며, 인류를 위한 싸움에서 가차 없이 싸울 것입니다. 사랑, 단결, 공동체를 전파하기 위해 함께 해주세요.”
Written by Hong Sukwoo, Fashion Journalist & <The NAVY Magazine>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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